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지타 모토시 (문단 편집) == 프로 시절 == [[파일:external/m.sponichi.co.jp/G20150606010485050_view.jpg]] [[파일:external/pds.exblog.jp/c0040422_662343.jpg]] 입단 첫해인 1957년 17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획득한 후지타는 1958년 29승, 1959년 27승을 올리며 2년 연속 [[MVP]]를 수상함과 동시에 [[교진군]]의 [[센트럴 리그]] 제패에 크게 공헌했으며, 1959년 6월 25일 '''천람시합'''([[천황]]이 직관하는 경기)으로 열린 대 [[한신 타이거즈|오사카 타이거즈]] 와의 홈 경기에서 [[나가시마 시게오]]의 9회말 [[끝내기 홈런]]에 힘입어 완투승을 거둔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나가시마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투수가 바로 [[무라야마 미노루]] 였다. 홈런이 나왔을 당시 [[고라쿠엔 구장]]의 조명 상태가 좋지 않아 나가시마의 타구가 좌측 파울폴을 맞았는지 빗겨 나갔는지 확실치 않았지만 마침 [[히로히토]]의 귀가 시간인 밤 9시 15분이 임박한 시점이었던 지라 주최측의 농간(?)으로 홈런이 되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아무튼 무라야마는 죽을 때 까지 그 때 얘기만 나오면 '''"그건 파울이었다"''' 라며 거품을 물었다고(...)] 그런데 대학시절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비운의 에이스''' 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1958년 [[일본 시리즈]] 부터 다시 달라 붙었으니, 그 해 시리즈에서 후지타는 상대인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이나오 가즈히사]]와 더불어 6시합에 출장하여 평균자책 1.09의 쾌투를 보였음에도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1승 2패에 그쳤고 팀도 니시테츠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특히 3승 1패로 시리즈 우승에 단 1승만을 남긴 5차전, 3대 2로 앞선 9회말 2사 3루라는 1아웃만 잡으면 우승 확정인 상황에서 마운드에 있던 후지타는 시리즈 5차전 까지 15타수 1안타로 물방망이를 자랑하던(...) '''세키구치 세이지'''에게 통한의 동점 적시타[* 일본 야구계에서는 세키구치의 이 동점타를 '''천만엔짜리 안타''' 라고 부른다. 이 해 세키구치는 10년 선수(FA제도의 전신) 자격을 얻어 타팀으로 이적하거나 원소속팀으로부터 재계약금을 수령할 수 있었는데, 이 안타 덕분에 니시테츠로부터 재계약금을 많이 받아냈기 때문. 쉽게 말하면 '''일본시리즈 대활약으로 인한 FA 대박'''.]를 얻어 맞았고, 이것이 결국 이날 [[이나오 가즈히사]]가 때린 ~~[[답내친]]~~ 10회말 [[끝내기 홈런]]의 화근이 되어버린 장면은 후지타로서는 땅을 칠 노릇이었다. 그리고 요미우리는 남은 2경기를 내리 내주며 니시테츠 에게 [[리버스 스윕|역전 우승]]을 허용했다... 이듬해 195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난카이 호크스]]의 에이스 [[스기우라 타다시]]에 맞서 2~4차전 연속으로 등판하는 괴력을 선보였지만 '''스기우라가 1~4차전 전부 마운드에 올라 전부 승리를 거두며''' 교진의 우승은 물론 후지타의 투혼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해 시리즈에서 후지타는 22이닝, 스기우라는 32이닝을 투구했다.] 더불어 후지타는 1958년 4차전부터 1961년 5차전까지 '''일본 시리즈 5연패(連敗)'''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무라야마 미노루]]([[한신 타이거즈|한신]]), [[키타벳푸 마나부]]([[히로시마 카프|히로시마]])도 보유하고 있다. 참고로 [[김시진]]은 [[한국 시리즈]] 통산 '''무승 7패''' 란 어마무시한 기록의 보유자이다(...) [[포스트시즌]]으로 범위를 넓혀도 '''무승 9패'''(...)] 이후 무리한 등판으로 어깨가 고장난 후지타는 1960년 시즌 이후 성적이 급속도로 하락했고, 1961년, 1963년 [[일본 시리즈]] 우승 멤버에 포함은 되었지만 정작 후지타는 시리즈 내내 선발 등판하여 초반에 KO 당하거나 구원 투수로 나와 대량실점 하는 등 [[영 좋지 않은]] 모습만 보였다(...). 1963년 시즌부터 선수 겸 코치로 뛰었고, 1964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상기 언급과 같이 프로 입문 시기가 다소 늦기도 했지만 불과 8년에 불과한 현역 시절이었다.[* 여담으로 당시 포수였던 [[모리 마사아키|모리 마사히코]]는 투수가 컨디션이 안 좋거나 실점을 하면 즉시 감독과 코치에 보고했으며 절대 자신의 탓으로 하지 않고 전적으로 투수에게 책임을 돌렸다. 모리가 주전 포수가 되고 나서 투수들이 벤치에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코치가 폭로한 적이 있는데, 모리가 저런 보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현역 시절 등번호 18번을 달고 훌륭한 활약을 보였으며, 이 18번을 [[호리우치 츠네오]]가 물려받아 준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18번은 [[교진군]]의 [[에이스]] 투수가 대대로 세습받는 번호가 되었다.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구와타 마스미]]-[[스기우치 도시야]]를 거쳐 2022년 현재는 [[스가노 도모유키]]가 18번을 달고 있다. 교진이 인기팀이었던 지라 각 팀의 에이스가 18번을 다는 관습은 전 야구계로 퍼졌고, 현재도 일본프로야구 에이스의 번호의 대명사는 18번이다. 8시즌 동안 통산 성적은 '''364경기 등판, 119승 88패, 평균자책 2.20, 924탈삼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